학생때 안하고 이제와서 역사공부

[경술국치]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한일병합 1910년 8월 29일

떵이 라이프 2024. 8. 31. 09:00
반응형

 

경술국치는 치욕의 그날 대한제국의 국권피탈의 날입니다.

경술국치 ()의 뜻은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의치욕이라는 뜻입니다.

한일병합으로 불리는 날이며 대한제국이 일본제국 본토의 일부로 흡수되어 멸망한 사건입니다.

 

한일합방 조약 조인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으로 실질적 통치권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사이에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창덕궁 흥복헌에서 회의를 거쳐 합병조약을 통과시켰고

1910년 8월 29일 이 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은 상실하였습니다.

그렇게 1392년에 태조이성계가가 세운 조선은 5백여 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완용은 1909년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당했지만

목숨을 건지고 1910년 조약을 결국 체결하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한국은 35년간 일제의 강점을 받게 되었으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무조건항복을 하고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았습니다.

 

 

일제강점기는 크게 3번의 통치로 분류합니다.

1910년대 무단통치, 1920년대 문화통치, 1930년대 민족말살통치

1910년대는 조선대형령, 토지조사사업, 회사령이 실시되고 학교선생님들이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일제강점기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이후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과 국가인 애국가도 금지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이 경기도 경성부로 격하되고 경기도 관할지역으로 편입돼

일본의 일개 지방도시로 격하되었습니다.

국어도 일본어가 되었으며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의 2등 국민이자 일본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말이 문화통 치지 겉보기로만 허용하는 척 풀어주는 척했던 시기입니다.

산미증식계획, 헌병이 보통경찰로바 뀌고, 언론·출판의 자유 제한적 허용,

회사령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변경되었습니다.

 

 

1930년대 민족말살통치는 국가총동원령(징용)을 이용해

일본 전시상황에 조선인들을 데려가서 강제징용하게 했습니다.

강제 신사참배, 일본식 성명강요,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했습니다.

 

특히 일본식 성명을 강요했던 창씨개명 기간은 6개월이었는데,

이 기간에 신고를 안 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창 씨를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는 학교의 입학과 진학이 불가했고

학교차원에서 거부할 경우학교자체를 폐교시켰습니다.

성인의 경우 공·사 기관에 취업할 수 없었으며 현직자도 해고합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징용 시 우선적 징용대상이 되었으며 식량 및 물자의 배급대상에서도 제외, 모든 민원사무도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을사오적은 이 모든 일을 예상이나 했을까요?

8월 29일이 경술국치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전에 마이클잭슨이 전성기였던 시대에는

마이클잭슨 생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광복절을 기억하는 것처럼 한일합병도 아픈 역사지만 기억 속에 깊게 새겨놔야겠습니다.

 

반응형